원작자를 넘어설 각오가 필요해
프랭크 허버트의 <듄>영상화와 관련된 신화와 진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1965년에 처음 출간된 뒤로 두 가지 미신을 끌고 다녔다. 하나는 SF 역사상 최고 걸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화가 불가능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듄>이 최고의 SF 소설 또는 소설 중 하나라는 주장은 거의 직관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일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대단한 야심작이기는 하다. 적어도 첫 번째 책은 재미있다. 장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하지만 걸작이 되기엔 문제가 많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책이 결국 한 무더기의 패스티시 덩어리라는 것이다. <듄>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인류가 항성간 여행을 통해 전 은하계를 커버하는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세계에서 백인 남자들이 공후백자남 놀이를 하며 만년의 시간을 날리고 있다. 이 자체가 통탄할 일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의 사고방식, 행동, 언어는 아서왕 이야기와 <젠다성의 포로> 사이에 있는 잡다한 옛 문학에서 가져와 SF 설정에 얼기설기 엮은 것 같다. 한마디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신 옛날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얼마 전에 SNS에서는 맘스터치에서 치킨버거 주문하는 과정을 성경 말투로 푼 게시물이 인기를 끈 적 있는데 그걸 생각하시면 되겠다. 그 결과물은 재미있지 만 보기만큼 믿을 만하지는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원작을 고스란히 옮기면 걸작이 되나?
둘째로, 이 책은 당시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낡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 백인 남자가 오리건에 있는 모래언덕과 (아마도)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감명받아 만든 가짜 아랍 문화와 가짜 백인 메시아에 대한 멋진 이야기로 당연히 제국주의 뽕에 찬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방향으로 흐른다. 소설이 종교와 철학을 다루는 방식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의 험악한 시대에 도달한 우리에겐 무책임하고 나태해 보인다.
셋째, <듄>은 그렇게까지 좋은 시리즈가 아니다. 성공적이었던 1편 뒤에 나온 여러 편의 소설들은 정도 차가 있지만 대부분 1편 뒤에 긴 꼬리처럼 달라붙은 사족이었다. 허버트 사후에도 이 시리즈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 책들은 아직 안 읽어 봤는데 읽는다고 해서 내 의견이 특별히 바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듄>의 세계는 한권의 긴 책으로 충분히 소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듄>이 제대로 영화화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주장의 반박은 심심할 정도로 쉽다. 지금 1부가 나온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 소설의 세 번째 각색물이다. 사람들이 앞의 두편에 만족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같은 소설이 세편이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심지어 드라마는 속편도 나왔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각색이 힘든 작품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듄>의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신화 절반은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가 만들었다. 1970년대에 호도로프스키는 <듄>을 어마어마한 길이의 대작영화로 만든다는 야심을 품었지만 장엄하게 실패했고 그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한 영화 중 가장 걸작이라는 애매한 명성을 얻었으며 심지어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까지 나왔다.
상상 속 모래행성에서 호도로프스키가 벌인 모험은 좋은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영화는 타협 속에서 만들어지는 협업 예술인데, 호도로프스키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타협을 안 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원작 소설이 아니라 호도로프스키 자신이었다. 그 비전에 충실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쳐도 영화가 훌륭하거나 재미있었을 가능성도 별로 높지 않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예술가가 타협의 과정을 통해 <듄> 영화를 만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듄> 영화는 1984년에 나왔다. 그해 최악의 흥행 실패작이고 데이비드 린치의 유일한 망작이다. 이 작품 역시 이 소설의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종종 불려온다. 이 영화의 혼란스러움, 잡다함, 조잡함의 상당 부분은 1980년대 관객에게 원작의 방대하고 복잡한 월드 빌딩의 재료들을 극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전달하기 위해 무리한 수를 둔 결과였다. 하지만 옹호할 구석이 없는 건 아닌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두 번째 <듄> 각색물은 <사이파이 채널>에서 방영된 3부작 미니시리즈다. 이 작품에서부터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미신은 조금씩 시들어간다. 역시 그렇게까지 걸작은 아니고 저예산 때문에 종종 애를 먹지만 프랭크 허버트의 방대한 세계의 정보를 영상 매체로 옮겨 설명하기 어렵다는 미신은 거의 완벽하게 깨진다. 심지어 이 시리즈가 그린 아라키스의 세계는 나중에 나온 빌뇌브의 세계보다 다채롭다. 빌뇌브의 아라키스가 영웅 서사를 위한 배경이라면 미니시리즈 버전 아라키스는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느껴진다.
미니시리즈의 가장 큰 이점은 물론 러닝타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점도 있었으니 그동안 일반 대중이 <듄>과 같은 이야기를 훨씬 이해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미신과 상관없이 <듄> 영화가 은근슬쩍 많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여가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타워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심지어 <비틀쥬스> 같은 영화들은 다 어느 정도 프랭크 허버트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듄> 영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SF 세계 사람들이 사막에서 모래충을 타고 질주하거나 칼싸움을 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게 되었다.
허버트의 <듄>은 빌뇌브보다 린치의 세계
자, 이제 얼마 전에 개봉된 빌뇌브 버전 이야기를 하자. 아직 2부작 영화의 1부이긴 하지만 이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듄> 각색물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액션이 많은 2부는 더 재미있을 것이고 빌뇌브가 두 번째 영화를 작정하고 망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하지만 이 영화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결정판’인가? 하면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빌뇌브의 개성이 허버트의 개성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빌뇌브가 아무리 청소년기 때부터 <듄>의 팬이었다고 해도, 빌뇌브가 상상하는 <듄>은 허버트의 <듄>과 많이 다르다. 거의 흑백영화에 가까운 화면은 경건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안 웃긴다. 후자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듄>의 충실한 각색물은 완전히 안 웃길 수가 없는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빌뇌브의 영화가 이렇게 작정하고 안 웃긴다는 것은 원작의 중요한 무언가, 즉 바로크적 성격이 청소되었다는 뜻이다. <듄>은 좀 웃기고 괴상하고 어처구니없고 종종 형편없이 못생겨야 정상이다. 허버트가 꿈꾼 세계는 빌뇌브의 세계보다 린치의 세계에 가깝다. 린치 영화의 괴상함과 조악함은 오히려 이 영화가 의외로 허버트의 비전에 충실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허버트는 평론가들이나 관객이 뭐라고 하건 린치 영화를 꽤 좋아했다고 한다.
허버트의 진짜 버전이 무엇이건 빌뇌브가 이를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온 1편만 해도 허버트의 주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기미가 보인다. 21세기에 <듄>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려면 원작자를 넘어설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때문에 원작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베네 게세리트 시리즈인 <시스터후드>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데이비드 린이 21세기에 부활한다면
인간을 중심에 두는 드니 빌뇌브의 스펙터클과 <듄>의 사막
드니 빌뇌브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친밀한 관계라는 말을 들었다. 연출자의 궤적을 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은 두 사람이다. 각각 캐나다와 영국에서 작은 영화로 시작했지만, 영화적으로 인정받으면서 할리우드로 이동해 점점 더 대작의 영역을 장식하는 감독으로 변했다. 윌리엄 와일러가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를 못 이기는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를 못 이기는 것처럼, 페데리코 펠리니가 루키노 비스콘티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못 이기는 것처럼, 스펙터클을 추구한 감독일수록 현혹의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펙터클이 죄는 아니다.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어쩌면 죄의 명목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스펙터클을 정의하려는 의도는 없다. 말하려는 것은 빌뇌브의 스펙터클이다. 나는 그의 스펙터클이 놀란의 그것이나 그들의 위대한 선배인 스탠리 큐브릭의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데이비드 린이라는 이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드라마에서 출발한 린은 중기를 지나면서 거대한 스펙터클의 창조자로 명성을 떨쳤다. 린의 스펙터클은 CG로 도배한 요즘의 스펙터클과 무엇이 다르며, 어떤 점에서 빌뇌브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왜 여자들만이 살아남는가
드니 빌뇌브가 지금까지 만든 10편의 장편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죽음’이다. 그것은 빌뇌브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하고 때론 출구를 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두 번째 작품 <소용돌이>(2000)에서 친구 사이의 대화에 등장하는 문구– 모든 인간의 행동은 죽음에 맞서는 표명이다- 는 빌뇌브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 이어진다. 여기서 표명이란 곧 결과를 의미하기에, 빌뇌브는 인물이 죽음과 관계를 맺게 된 사연을 먼저 드러낸다. 초기 영화에서 그 역할은 주로 여자의 몫이었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1998)의 여자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접하고 우선 아이를 낳기를 결심한다. <소용돌이>의 여자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뒤 심리적 불안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한 노인을 치어 세상을 떠나게 만든다.
<폴리테크닉>(2009)에서 교내 총기 테러 사건을 겪은 여학생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을린 사랑>(2010)은 종교 내전에 휩싸인 여자가 통과했던 지독한 생사의 여정과 관련된 이야기다. 타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요즘과 달리, 이 시기의 빌뇌브는 본인이 직접 쓰거나 각색한 이야기에 의존했다. 남자감독으로서 줄곧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곤 했으나 페미니즘의 경향을 따르거나 지지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흥미로운 부분은 네 영화의 주인공이 공히 임신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임신한 여성의 미묘한 심리가 죽음과 마주한 인간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임신과 출산의 행위를 죽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으로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할리우드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타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이 몇 차례 남성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성을 죽음의 반대 위치에 놓는 태도는 신작 <듄>이 나온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다.
자연스레 빌뇌브의 영화에서 남성은 죽음의 역할을 맡는다. 육체적으로 죽는 경우는 당연하고, 실질적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역할도 모두 남성의 것이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의 남자는 코마에 빠지고, <소용돌이>는 남자 화자(話者)를 연기하는 생선이 마지막 숨결을 거두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폴리테크닉>의 남학생은 실제로 1989년에 총기 테러를 벌인 인물을 모델로 삼았으며, <그을린 사랑>의 남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족의 비극을 낳은 악당이다. 이렇게 남성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는 <프리즈너스>(2013), <에너미>(2013) 등 근작으로 옮겨오면서 더욱 짙어진다. 전쟁과 복수의 명분으로 수많은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들은 <컨택트>(2016)에서 외계를 일단 적으로 간주해 세계적인 혼란을 빚는다. 꼭 빌뇌브의 영화가 아니어도 남자와 폭력의 역사를 다룬 영화의 예는 수없이 많다, 고 말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빌뇌브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대비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죽은 남자를 딛고 마침내 살아남는 존재가 반드시 여자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괴와 폭력과 죽음에 대항해 생명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와 사막이라는 장소
대중영화의 감독으로서 빌뇌브가 초기 영화로부터 가장 발전한 부분은 명확한 영화언어다.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해하게 돕는 역할에 충실하다. 이건 스토리텔러를 넘어선 능력이다. <에너미>까지 흔적이 일부 남았던 상징적인 표현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다. 출신인 퀘벡 시네마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더이상 치중하지 않으며, 진 시버그나 마오쩌둥의 포스터를 붙여놓는 짓 따위도 하지 않는다. 반면 시각적인 표현은 뛰어난 성취를 거듭해왔다. 거대한 자연 속에 인간을 대비시키는 이미지는 초기 영화부터 발군의 표현력을 자랑했다. <폴리테크닉>의 설원, <소용돌이>의 댐, <에너미>의 현대 건축물 등이 그런 예인데, 빌뇌브가 그중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사막이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임신을 위해 사막으로 가기를 제안한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에서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로 향한다. 두 인물이 헤매는 하얀 소금 사막이 장관을 연출하는데, 사방이 평지인 그곳에서 남자가 툭 던지는 대사– 여기에 사구(Dune)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는 마치 20년 후를 예견한 듯하다.
사막과 거대한 황무지에 대한 매혹은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듄>으로 전개된다. 여자와 남자를 생명과 죽음의 존재로 인식해온 빌뇌브에게 사막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품은 대상이며, <듄>의 사막은 주인공 폴과 한몸을 이루며 제일 중요한 빌뇌브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구원자로서 폴의 성격은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제를 비롯한 남자들의 무리가 표면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양 보이지만, 예지력을 품은 신비스러운 여자들의 리그인 베네 게세리트가 영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세계가 <듄>이다. 베네 게세리트 출신인 여자가 딸만 잉태한다는 계율을 거부하고 낳은 남자아이가 구원자가 된다는 설정은 앞선 빌뇌브 영화의 세계를 확장한다. 전쟁과 착취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태어난 폴의 가장 큰 능력은 어머니의 그것을 승계한 것이며, 그러한 능력 아래 자란 소년의 존재는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다. 빌뇌브는 타인을 대하는 자세가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가는 환경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듄>의 사막에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이였던 로렌스가 아득한 사막에서 세운 역사를 다룬 이야기는 물론이고, 사막과 인간을 나란히 두어 시각화한 표현이 그러하다. 웅장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했던 린의 스펙터클이 21세기에 부활했다면 그게 빌뇌브의 영화다. 그의 영화에서 다시 <닥터 지바고>의 대서사가 흐르고, <라이언의 딸>의 바람이 불고, <인도로 가는 길>의 달이 빛난다. 평자들은 리들리 스콧을 거론하지만 글쎄다, 내 생각은 다르다. 빌뇌브의 스펙터클은 스콧의 그것처럼 현란한 성격은 아니지 않나. 스펙터클을 추구하되 인간을 중심에 두는 걸 잊지 않는 빌뇌브는 거센 속도를 억누르면서 정확한 이미지를 구사하는 쪽이다.
라 부르건 상관없다. <듄>은 우아하고 때때로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로 빛나는 영화이고, 레토의 육체는 그 자리에 필요하다.
기꺼이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기로 한 창조자
드니 빌뇌브의 <듄>에 대한 경탄은 대부분 비주얼의 완성도와 방향을 향한다. 황홀하고 경이로운 이미지로 거대한 무드를 자아내고 장면의 톤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완성도를 논한다면 원작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을 광경을 그보다 더 생생하게 구현하는 장면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스토리가 이해되기 이전에 이미지가 직관적으로 시신경에 꽂힌다고 해도 좋겠다. 방향에 대해서는 드니 빌뇌브 특유의 뺄셈의 공식이 적용된다. 그의 회화는 언제나 디테일을 비워내고 여백을 만들어내는 쪽이었다. 사실 그는 화면을 비운 적이 없다. 흔히 여백이라고 불리는 공간감을 가득 채우는 쪽에 가깝다. <듄>의 스크린에는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이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군중이 몰려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방식과는 또 다른 종류의 스펙터클이 들어찬다.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는 상황에 따라 희고 검고 푸르고 누런 하나의 색으로 메워지고 그 위에 점처럼 왜소한 인간을 가져다놓는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사이즈의 쾌감.
여기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사이즈보다는 속도와 호흡에 힘을 주는 것이다. 그저 크기를 키운다고 웅장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장면에 무게를 더하는 작업이다. 무게는 곧 속도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중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드니 빌뇌브의 컷은 흔히 말하는 롱테이크라 할 만큼 길진 않지만 캔버스의 액자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을 충분히 오래 응시한다. 거의 서막에 불과한 <듄>의 서사에 150분에 달하는 시간이 투입된 건 매컷 충분하게 장면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네마틱’한 순간은 감독의 회화적인 시선이 충분한 시간으로 조리되었을 때 피어난다. 그리하여 예정된 메시아로서의 폴(티모시 샬라메)의 여정은 그의 능력 중 하나인 미래에 대한 단편적인 비전과 함께 감각적으로 제시된다. 키워드는 두 가지다. 감각. 그리고 제시. <듄>의 장면들은 유기적인 연쇄의 결과를 통해 스토리를 자아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 매 장면 이야기보다 무드와 뉘앙스가 먼저 도착하여 관객이 설득되기도 전에 동조시키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는 애초에 방대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창조자라기보다는 관찰자에 가깝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텍트>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드니 빌뇌브는 세계관이 어쩌고, 세계의 진실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 창조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는 시큰둥했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그곳의 일부를 잘라서 포착할 뿐이다. 그것이 드니 빌뇌브의 탁월한 지점이었다. 가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관객의 머릿속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그저 재현하여 보여주거나. 물론 드니 빌뇌브는 후자다. 대개 가상의 세계관을 제시할 땐 디테일을 꽉 채워 사실과 비슷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리얼리티를 끌어올려 설득하는 방식이다.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의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공룡의 정보, 이를테면 피부의 질감, 무게감, 웅장한 소리 등 실재하는 정보를 사실적으로 끌어모은 것을 연상하면 쉽다. 드니 빌뇌브는 반대로 움직인다. 이게 말이 된다고 설명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가상) 세계의 일부에 카메라를 떨어트린 것처럼 그저 포착한다. 현실을 닮으려 애쓰는 대신 (카메라를 바가지 삼아 퍼)담는 영화. 과시하지 않고 제시하는 영화. 상상력으로 창조된 세계에 대한 리얼리즘적 접근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름답고 황량한 사막, 이어질 여정을 기다리며
사실 이걸 문제라고 불러야 할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까지만 해도 나는 ‘영화라는 물질’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와 욕망에 경탄과 찬사를 바치는 쪽이었다. 하지만 <듄>을 마주하며 내 안의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듄>을 향한 아쉬운 목소리들은 대체로 빈약하고 불친절한 서사를 지적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어떻게 몰락하고, 폴이 어떻게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며, 메시아로 거듭날 준비를 마치는 것까지가 이야기의 전부다. 익숙한 영웅 서사에 빗대어 보아도 서막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 그럼에도 <듄>이 서사적으로 빈약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영화에 부족한 건 사건의 총량이 아니라 이야기의 총량이다. 사실 <듄>은 드니 빌뇌브의 영화 중에서도 드물게 친절한 편이다. 어쩌면 너무 친절한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각 인물들의 상태를 충분히 따라가고, 아라키스 행성의 상황도 충분히 관객 속에 스며들 때까지 기다린다. 다만 그렇게 완벽한 장면들을 뭉치고 뭉쳐 완성된 이야기의 덩어리는 우리가 목격한 것들의 웅장함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왜소하다.
<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드니 빌뇌브는 폴의 여정, 첫걸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적어도 프랭크 허버트의 <듄>에서 폴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메시아, 광신자, 학살자를 넘나든다. 이것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의 <듄>은 ‘(예견된) 메시아가 온다’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남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멋지다는 것? 프레멘들의 존재감이 신비롭다는 것? 용감무쌍한 던컨(제이슨 모모아)의 활약상을 더 보고 싶다는 것? <듄>의 이미지와 장면들이 너무나 많은 감흥을 남기는 데 반해 이야기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메시지를 위한 도구는 아니다. 나도 안다.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문구는 영화예술의 방패막이로 자주 인용되어왔다. 다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메시지가 아니라 질문이다. 표면적으로 인간인가 안드로이드인가를 놓고 따지는 것처럼 보였던 <블레이드 러너>는 그 끝에서 누가 더 인간다운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조차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 대한 탐문은 이어졌다. <듄>은 어떤가. 이야기가 메말라버린 자리에 어떤 질문과 가치가 남겨지는가. <듄>이 끝난 뒤 불 켜진 극장은 아라키스 사막처럼 황량하다. 황량하지만 그 사막은 분명 아름답기도 하다. 2부에서 이어질 여정이 확신에 찬 메시아의 행보가 될지 아니면 미완의 방랑에 그칠지 알 수 없다.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미 원작의 예정된 길을 미세하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이상 미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나는 그저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