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제룡

제룡전기 주주총회 전문

의장 인사말
지난 한해 당사의 경영환경은 건설경기 악화 등으로 내수시장은 좋지 않았으나, 미국 내 전력망 노후화 및 신규 전력수요 증가 등으로 수출시장은 호조를 보였습니다.

당사는 수출시장 대응을 위하여 무분별한 투자는 지양하고, 합리적인 설비투자와 일부 공정의 외주생산 활용, 고숙련 인력의 지속적인 육성, 생산효율 개선 등을 통하여 생산 능력과 납기안정성을 제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방침으로 고객사로부터 제품의 신뢰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2023년도 영업실적은 외형성장 뿐만 아니라 이익률 또한 크게 증가함에 따라 전년도에 이어 창사 이래 최대실적을 다시 한번 갱신하는 한해가 되었습니다. 

2024년도에는 내수시장 환경은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어 고마진 중심으로 선별수주를 실시할 예정이며, 수출시장의 경우 신제품 및 신규거래선 발굴을 통하여 수주 및 영업실적 증대를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23년 매출은 1,839억원으로 전년 860억원 대비 338.9% 증가, 영업이익은 701억원으로 전년 159억원 대비 352.8% 증가, 당기순이익은 563억원으로 전년 125억원 대비 352.8% 증가하였습니다.

자산 총계는 전년 대비 80.5% 증가한 1,589억원, 부채 총계는 98.5% 증가한 338억원, 자본총계는 76.2% 증가한 1,248억원입니다. 자기자본 비율 78.7%, 부채 비율 27.2%로 동종 업계 대비 양호한 수준입니다.

제1호 의안 : 제38기 재무제표 승인의 건 (승인)
외부감사인 의견 적정

제2호 의안 : 정관 일부 변경의 건 (승인)
자산 총액 1,000억원 초과하여 상근 감사 및 사외이사 선임요건 정관에 추가

제3호 의안 : 이사 선임의 건 (승인)
박종태 사내이사 중임
김현순 사내이사 연임
김희준 사외이사 신규선임

제4호 의안 : 감사 선임의 건 (승인)
김광섭 상근감사 선임

제5호 의안 : 이사 보수한도액 승인의 건 (승인)
이사보수 한도액 30억원 -> 35억원 상향

제6호 의안 : 감사 보수한도액 승인의 건 (승인)
감사보수 한도액 1억 5천만원 동결

Q&A
Q. 공시한 수주 계약에 대해서만 사업보고서 수주상황에 기입해서 매출 추정이 어렵습니다.
A. 맞습니다. 사업보고서상 수주잔고는 모든 수주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현재와 같이 수주 건별로 수주잔고를 기입하지 않고 ‘총액’ 기준으로 바꾸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사업보고서상 수주잔고는 2,570억원입니다. 이 중 25년 납기로 되어있는 수주를 제외하면 1,600억원 정도 됩니다. 여기에 국내 매출 300~350억원을 더하면 1,900억원 정도 됩니다. 2024년에 최소 1,900억원 매출을 달성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과거 3년동안 국내 매출 300~350억원 꾸준히 달성) 물론 12월 납기 에정인 경우 다음해에 매출 인식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작년 12월 납기 건도 똑같이 올해 매출로 반영되기 때문에 큰 변수가 아닙니다.

Q.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추가 수주가 절실해보입니다. 기대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23년 매출이 1,800억원이다 보니 이제 180억원 이상의 수주 건에 대해서만 공시가 나갑니다. 솔직히 180억원 이상의 수주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적이 본격적으로 성장한지 올해가 4년차 입니다. 2020년 12월 말부터 수주공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쭉 성장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코로나로 인해 공장 셧다운으로 인해 물류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재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보니 가격 불문 제작판매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무조건 오더를 냈습니다. 멕시코 공장 안돌아갔고 미국 자체 공장도 안돌아갔습니다. 미국의 많은 변압기 회사들의 공장이 멕시코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품종 대량 생산 위주로 수주를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3년 되다 보니 고객사의 재고가 어느 정도 찼을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조건 오더를 내리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필요한 스펙을 ‘적정 가격’에 제조해달라는 요청이 올거라 예상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스펙이란 일반적인 변압기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거나 용량이 조금 더 큰 오더들이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이런 오더들 위주로 ‘선별 수주’할 계획입니다.

Q.’선별 수주’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A.일단 마진이 박한거는 배제할 겁니다. 다양한 범용 제품을 요구하는 수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50억 정도의 수주이면서 20~30가지 규격 요구하는 경우 입니다. 이러한 것들도 배제할 방침입니다. 범용 제품은 가급적 효율 중심으로 수주를 받아 속도전으로 밀어낼 겁니다. 그리고 조금 특이한 스펙(특정 악세사리, 특정 전압/전류 범위 등)들은 다른 기업들이 제작하지 못합니다. 이런 제품들은 데이터 센터와 같은 특수 지역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선별 수주’받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Q. 경쟁사 대비 영업이익률이 높은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우리는 타경쟁사 보다 규모가 크다 보니 바게닝 파워가 있어 원재료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일공장에서 생산하다 보니 생산 효율이 높습니다.

Q. 여전히 판매 단가는 유지되고 있는 상황인가요?
A.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 LA전력청이 옛날부터 한국에서 변압기를 많이 사갔습니다. 저희도 5년 장기 계약 체결한 적이 있습니다. LA전력청은 입찰을 시킵니다. 입찰에 참여하면 가격 경쟁에 들어가는데, 우리는 아직 입찰하면서까지 수주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Q. 가동률이 130%를 넘었습니다.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가동률이 올라가는건 힘든가요?
A. 사업보고서상 가동률은 인력 가동률이고 최대 130%입니다. 130% 넘어가면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직원을 뽑고 있습니다. 현재 기능직 숫자는 113명입니다. 21~22년에 채용된 사람들의 숙련도가 올라가 생산효율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사업보고서상 가동률을 생산성 지표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Q. 인력을 추가적으로 확충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A. 과거처럼 인력을 급격하게 채용할 계획은 없습니다만 기능직 인력을 계속 늘려갈 계획입니다. 증가율은 과거보다 낮을 겁니다.

Q. 증설 계획이 따로 있으신가요?
A. 내부적으로 미국 시장이 롱런을 할거냐에 대해서는 우린 아직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단 기존 부지를 우선적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합리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초고압 변압기 진출도 고려하고 있으신가요?
A. 과거에 초고압 변압기 검토했었습니다. 실제로 이를 고려해서 공장 층고를 높게 지었습니다. 하지만 초고압 변압기 시장 진출 게획은 철회하고, 중소형 변압기 전문 회사로 가겠다는 것이 현재 경영 방침입니다.

Q. 미국 외 국가에 수출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A. 나라마다 변압기 규격과 특성이 다 다릅니다. 페인트 칠하는 법까지 다릅니다. 현재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니 한 국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로서는 미국 시장에서 먹을게 충분한 상황이어서 굳이 생산 스케줄을 조절해가면서 이란이나 사우디 쪽으로 변압기를 제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Q. AI용 데이터센터가 기존 데이터센터 보다 더 많은 전력을 요구합니다. 이런 흐름에서 우리 회사가 수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A. 우리 회사의 변압기 중 몰드 변압기가 데이터 센터에 들어갑니다. 네이버 데이터 센터에도 들어갔습니다. 

Q.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는 초고압 변압기만 수혜를 입는 것 아닌가요?
A. 아닙니다. 마지막 서버 단으로 전기가 흘러들어갈 때는 우리의 배전 변압기로 전압을 낮춰줘야 합니다. 데이터 센터가 사용하는 전력량이 늘수록 배전변압기도 늘어납니다.

https://t.me/Brain_And_Body_Research (비비리서치)

2024년 3월 22일 금요일

원작자를 넘어설 각오가 필요해
프랭크 허버트의 <듄>영상화와 관련된 신화와 진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1965년에 처음 출간된 뒤로 두 가지 미신을 끌고 다녔다. 하나는 SF 역사상 최고 걸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화가 불가능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듄>이 최고의 SF 소설 또는 소설 중 하나라는 주장은 거의 직관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일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대단한 야심작이기는 하다. 적어도 첫 번째 책은 재미있다. 장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하지만 걸작이 되기엔 문제가 많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책이 결국 한 무더기의 패스티시 덩어리라는 것이다. <듄>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인류가 항성간 여행을 통해 전 은하계를 커버하는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세계에서 백인 남자들이 공후백자남 놀이를 하며 만년의 시간을 날리고 있다. 이 자체가 통탄할 일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의 사고방식, 행동, 언어는 아서왕 이야기와 <젠다성의 포로> 사이에 있는 잡다한 옛 문학에서 가져와 SF 설정에 얼기설기 엮은 것 같다. 한마디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신 옛날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얼마 전에 SNS에서는 맘스터치에서 치킨버거 주문하는 과정을 성경 말투로 푼 게시물이 인기를 끈 적 있는데 그걸 생각하시면 되겠다. 그 결과물은 재미있지 만 보기만큼 믿을 만하지는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원작을 고스란히 옮기면 걸작이 되나?

둘째로, 이 책은 당시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낡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 백인 남자가 오리건에 있는 모래언덕과 (아마도)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감명받아 만든 가짜 아랍 문화와 가짜 백인 메시아에 대한 멋진 이야기로 당연히 제국주의 뽕에 찬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방향으로 흐른다. 소설이 종교와 철학을 다루는 방식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의 험악한 시대에 도달한 우리에겐 무책임하고 나태해 보인다.

셋째, <듄>은 그렇게까지 좋은 시리즈가 아니다. 성공적이었던 1편 뒤에 나온 여러 편의 소설들은 정도 차가 있지만 대부분 1편 뒤에 긴 꼬리처럼 달라붙은 사족이었다. 허버트 사후에도 이 시리즈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 책들은 아직 안 읽어 봤는데 읽는다고 해서 내 의견이 특별히 바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듄>의 세계는 한권의 긴 책으로 충분히 소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듄>이 제대로 영화화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주장의 반박은 심심할 정도로 쉽다. 지금 1부가 나온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 소설의 세 번째 각색물이다. 사람들이 앞의 두편에 만족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같은 소설이 세편이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심지어 드라마는 속편도 나왔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각색이 힘든 작품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듄>의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신화 절반은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가 만들었다. 1970년대에 호도로프스키는 <듄>을 어마어마한 길이의 대작영화로 만든다는 야심을 품었지만 장엄하게 실패했고 그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한 영화 중 가장 걸작이라는 애매한 명성을 얻었으며 심지어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까지 나왔다.

상상 속 모래행성에서 호도로프스키가 벌인 모험은 좋은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영화는 타협 속에서 만들어지는 협업 예술인데, 호도로프스키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타협을 안 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원작 소설이 아니라 호도로프스키 자신이었다. 그 비전에 충실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쳐도 영화가 훌륭하거나 재미있었을 가능성도 별로 높지 않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예술가가 타협의 과정을 통해 <듄> 영화를 만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듄> 영화는 1984년에 나왔다. 그해 최악의 흥행 실패작이고 데이비드 린치의 유일한 망작이다. 이 작품 역시 이 소설의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종종 불려온다. 이 영화의 혼란스러움, 잡다함, 조잡함의 상당 부분은 1980년대 관객에게 원작의 방대하고 복잡한 월드 빌딩의 재료들을 극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전달하기 위해 무리한 수를 둔 결과였다. 하지만 옹호할 구석이 없는 건 아닌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두 번째 <듄> 각색물은 <사이파이 채널>에서 방영된 3부작 미니시리즈다. 이 작품에서부터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미신은 조금씩 시들어간다. 역시 그렇게까지 걸작은 아니고 저예산 때문에 종종 애를 먹지만 프랭크 허버트의 방대한 세계의 정보를 영상 매체로 옮겨 설명하기 어렵다는 미신은 거의 완벽하게 깨진다. 심지어 이 시리즈가 그린 아라키스의 세계는 나중에 나온 빌뇌브의 세계보다 다채롭다. 빌뇌브의 아라키스가 영웅 서사를 위한 배경이라면 미니시리즈 버전 아라키스는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느껴진다.

미니시리즈의 가장 큰 이점은 물론 러닝타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점도 있었으니 그동안 일반 대중이 <듄>과 같은 이야기를 훨씬 이해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각색 불가능성’에 대한 미신과 상관없이 <듄> 영화가 은근슬쩍 많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여가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타워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심지어 <비틀쥬스> 같은 영화들은 다 어느 정도 프랭크 허버트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듄> 영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SF 세계 사람들이 사막에서 모래충을 타고 질주하거나 칼싸움을 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게 되었다.

허버트의 <듄>은 빌뇌브보다 린치의 세계

자, 이제 얼마 전에 개봉된 빌뇌브 버전 이야기를 하자. 아직 2부작 영화의 1부이긴 하지만 이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듄> 각색물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액션이 많은 2부는 더 재미있을 것이고 빌뇌브가 두 번째 영화를 작정하고 망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하지만 이 영화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결정판’인가? 하면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빌뇌브의 개성이 허버트의 개성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빌뇌브가 아무리 청소년기 때부터 <듄>의 팬이었다고 해도, 빌뇌브가 상상하는 <듄>은 허버트의 <듄>과 많이 다르다. 거의 흑백영화에 가까운 화면은 경건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안 웃긴다. 후자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듄>의 충실한 각색물은 완전히 안 웃길 수가 없는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빌뇌브의 영화가 이렇게 작정하고 안 웃긴다는 것은 원작의 중요한 무언가, 즉 바로크적 성격이 청소되었다는 뜻이다. <듄>은 좀 웃기고 괴상하고 어처구니없고 종종 형편없이 못생겨야 정상이다. 허버트가 꿈꾼 세계는 빌뇌브의 세계보다 린치의 세계에 가깝다. 린치 영화의 괴상함과 조악함은 오히려 이 영화가 의외로 허버트의 비전에 충실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허버트는 평론가들이나 관객이 뭐라고 하건 린치 영화를 꽤 좋아했다고 한다.

허버트의 진짜 버전이 무엇이건 빌뇌브가 이를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온 1편만 해도 허버트의 주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기미가 보인다. 21세기에 <듄>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려면 원작자를 넘어설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때문에 원작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베네 게세리트 시리즈인 <시스터후드>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데이비드 린이 21세기에 부활한다면
인간을 중심에 두는 드니 빌뇌브의 스펙터클과 <듄>의 사막

드니 빌뇌브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친밀한 관계라는 말을 들었다. 연출자의 궤적을 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은 두 사람이다. 각각 캐나다와 영국에서 작은 영화로 시작했지만, 영화적으로 인정받으면서 할리우드로 이동해 점점 더 대작의 영역을 장식하는 감독으로 변했다. 윌리엄 와일러가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를 못 이기는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를 못 이기는 것처럼, 페데리코 펠리니가 루키노 비스콘티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못 이기는 것처럼, 스펙터클을 추구한 감독일수록 현혹의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펙터클이 죄는 아니다.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어쩌면 죄의 명목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스펙터클을 정의하려는 의도는 없다. 말하려는 것은 빌뇌브의 스펙터클이다. 나는 그의 스펙터클이 놀란의 그것이나 그들의 위대한 선배인 스탠리 큐브릭의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데이비드 린이라는 이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드라마에서 출발한 린은 중기를 지나면서 거대한 스펙터클의 창조자로 명성을 떨쳤다. 린의 스펙터클은 CG로 도배한 요즘의 스펙터클과 무엇이 다르며, 어떤 점에서 빌뇌브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왜 여자들만이 살아남는가


드니 빌뇌브가 지금까지 만든 10편의 장편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죽음’이다. 그것은 빌뇌브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하고 때론 출구를 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두 번째 작품 <소용돌이>(2000)에서 친구 사이의 대화에 등장하는 문구– 모든 인간의 행동은 죽음에 맞서는 표명이다- 는 빌뇌브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 이어진다. 여기서 표명이란 곧 결과를 의미하기에, 빌뇌브는 인물이 죽음과 관계를 맺게 된 사연을 먼저 드러낸다. 초기 영화에서 그 역할은 주로 여자의 몫이었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1998)의 여자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접하고 우선 아이를 낳기를 결심한다. <소용돌이>의 여자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뒤 심리적 불안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한 노인을 치어 세상을 떠나게 만든다.

<폴리테크닉>(2009)에서 교내 총기 테러 사건을 겪은 여학생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을린 사랑>(2010)은 종교 내전에 휩싸인 여자가 통과했던 지독한 생사의 여정과 관련된 이야기다. 타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요즘과 달리, 이 시기의 빌뇌브는 본인이 직접 쓰거나 각색한 이야기에 의존했다. 남자감독으로서 줄곧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곤 했으나 페미니즘의 경향을 따르거나 지지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흥미로운 부분은 네 영화의 주인공이 공히 임신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임신한 여성의 미묘한 심리가 죽음과 마주한 인간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임신과 출산의 행위를 죽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으로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할리우드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타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이 몇 차례 남성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성을 죽음의 반대 위치에 놓는 태도는 신작 <듄>이 나온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다.

자연스레 빌뇌브의 영화에서 남성은 죽음의 역할을 맡는다. 육체적으로 죽는 경우는 당연하고, 실질적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역할도 모두 남성의 것이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의 남자는 코마에 빠지고, <소용돌이>는 남자 화자(話者)를 연기하는 생선이 마지막 숨결을 거두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폴리테크닉>의 남학생은 실제로 1989년에 총기 테러를 벌인 인물을 모델로 삼았으며, <그을린 사랑>의 남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족의 비극을 낳은 악당이다. 이렇게 남성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는 <프리즈너스>(2013), <에너미>(2013) 등 근작으로 옮겨오면서 더욱 짙어진다. 전쟁과 복수의 명분으로 수많은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들은 <컨택트>(2016)에서 외계를 일단 적으로 간주해 세계적인 혼란을 빚는다. 꼭 빌뇌브의 영화가 아니어도 남자와 폭력의 역사를 다룬 영화의 예는 수없이 많다, 고 말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빌뇌브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대비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죽은 남자를 딛고 마침내 살아남는 존재가 반드시 여자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괴와 폭력과 죽음에 대항해 생명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와 사막이라는 장소

대중영화의 감독으로서 빌뇌브가 초기 영화로부터 가장 발전한 부분은 명확한 영화언어다.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해하게 돕는 역할에 충실하다. 이건 스토리텔러를 넘어선 능력이다. <에너미>까지 흔적이 일부 남았던 상징적인 표현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다. 출신인 퀘벡 시네마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더이상 치중하지 않으며, 진 시버그나 마오쩌둥의 포스터를 붙여놓는 짓 따위도 하지 않는다. 반면 시각적인 표현은 뛰어난 성취를 거듭해왔다. 거대한 자연 속에 인간을 대비시키는 이미지는 초기 영화부터 발군의 표현력을 자랑했다. <폴리테크닉>의 설원, <소용돌이>의 댐, <에너미>의 현대 건축물 등이 그런 예인데, 빌뇌브가 그중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사막이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임신을 위해 사막으로 가기를 제안한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에서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로 향한다. 두 인물이 헤매는 하얀 소금 사막이 장관을 연출하는데, 사방이 평지인 그곳에서 남자가 툭 던지는 대사– 여기에 사구(Dune)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는 마치 20년 후를 예견한 듯하다.

사막과 거대한 황무지에 대한 매혹은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듄>으로 전개된다. 여자와 남자를 생명과 죽음의 존재로 인식해온 빌뇌브에게 사막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품은 대상이며, <듄>의 사막은 주인공 폴과 한몸을 이루며 제일 중요한 빌뇌브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구원자로서 폴의 성격은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제를 비롯한 남자들의 무리가 표면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양 보이지만, 예지력을 품은 신비스러운 여자들의 리그인 베네 게세리트가 영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세계가 <듄>이다. 베네 게세리트 출신인 여자가 딸만 잉태한다는 계율을 거부하고 낳은 남자아이가 구원자가 된다는 설정은 앞선 빌뇌브 영화의 세계를 확장한다. 전쟁과 착취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태어난 폴의 가장 큰 능력은 어머니의 그것을 승계한 것이며, 그러한 능력 아래 자란 소년의 존재는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다. 빌뇌브는 타인을 대하는 자세가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가는 환경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듄>의 사막에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이였던 로렌스가 아득한 사막에서 세운 역사를 다룬 이야기는 물론이고, 사막과 인간을 나란히 두어 시각화한 표현이 그러하다. 웅장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했던 린의 스펙터클이 21세기에 부활했다면 그게 빌뇌브의 영화다. 그의 영화에서 다시 <닥터 지바고>의 대서사가 흐르고, <라이언의 딸>의 바람이 불고, <인도로 가는 길>의 달이 빛난다. 평자들은 리들리 스콧을 거론하지만 글쎄다, 내 생각은 다르다. 빌뇌브의 스펙터클은 스콧의 그것처럼 현란한 성격은 아니지 않나. 스펙터클을 추구하되 인간을 중심에 두는 걸 잊지 않는 빌뇌브는 거센 속도를 억누르면서 정확한 이미지를 구사하는 쪽이다.

라 부르건 상관없다. <듄>은 우아하고 때때로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로 빛나는 영화이고, 레토의 육체는 그 자리에 필요하다.


기꺼이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기로 한 창조자

드니 빌뇌브의 <듄>에 대한 경탄은 대부분 비주얼의 완성도와 방향을 향한다. 황홀하고 경이로운 이미지로 거대한 무드를 자아내고 장면의 톤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완성도를 논한다면 원작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을 광경을 그보다 더 생생하게 구현하는 장면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스토리가 이해되기 이전에 이미지가 직관적으로 시신경에 꽂힌다고 해도 좋겠다. 방향에 대해서는 드니 빌뇌브 특유의 뺄셈의 공식이 적용된다. 그의 회화는 언제나 디테일을 비워내고 여백을 만들어내는 쪽이었다. 사실 그는 화면을 비운 적이 없다. 흔히 여백이라고 불리는 공간감을 가득 채우는 쪽에 가깝다. <듄>의 스크린에는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이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군중이 몰려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방식과는 또 다른 종류의 스펙터클이 들어찬다.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는 상황에 따라 희고 검고 푸르고 누런 하나의 색으로 메워지고 그 위에 점처럼 왜소한 인간을 가져다놓는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사이즈의 쾌감.

여기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사이즈보다는 속도와 호흡에 힘을 주는 것이다. 그저 크기를 키운다고 웅장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장면에 무게를 더하는 작업이다. 무게는 곧 속도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중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드니 빌뇌브의 컷은 흔히 말하는 롱테이크라 할 만큼 길진 않지만 캔버스의 액자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을 충분히 오래 응시한다. 거의 서막에 불과한 <듄>의 서사에 150분에 달하는 시간이 투입된 건 매컷 충분하게 장면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네마틱’한 순간은 감독의 회화적인 시선이 충분한 시간으로 조리되었을 때 피어난다. 그리하여 예정된 메시아로서의 폴(티모시 샬라메)의 여정은 그의 능력 중 하나인 미래에 대한 단편적인 비전과 함께 감각적으로 제시된다. 키워드는 두 가지다. 감각. 그리고 제시. <듄>의 장면들은 유기적인 연쇄의 결과를 통해 스토리를 자아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 매 장면 이야기보다 무드와 뉘앙스가 먼저 도착하여 관객이 설득되기도 전에 동조시키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는 애초에 방대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창조자라기보다는 관찰자에 가깝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텍트>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드니 빌뇌브는 세계관이 어쩌고, 세계의 진실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 창조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는 시큰둥했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그곳의 일부를 잘라서 포착할 뿐이다. 그것이 드니 빌뇌브의 탁월한 지점이었다. 가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관객의 머릿속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그저 재현하여 보여주거나. 물론 드니 빌뇌브는 후자다. 대개 가상의 세계관을 제시할 땐 디테일을 꽉 채워 사실과 비슷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리얼리티를 끌어올려 설득하는 방식이다.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의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공룡의 정보, 이를테면 피부의 질감, 무게감, 웅장한 소리 등 실재하는 정보를 사실적으로 끌어모은 것을 연상하면 쉽다. 드니 빌뇌브는 반대로 움직인다. 이게 말이 된다고 설명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가상) 세계의 일부에 카메라를 떨어트린 것처럼 그저 포착한다. 현실을 닮으려 애쓰는 대신 (카메라를 바가지 삼아 퍼)담는 영화. 과시하지 않고 제시하는 영화. 상상력으로 창조된 세계에 대한 리얼리즘적 접근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름답고 황량한 사막, 이어질 여정을 기다리며

사실 이걸 문제라고 불러야 할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까지만 해도 나는 ‘영화라는 물질’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와 욕망에 경탄과 찬사를 바치는 쪽이었다. 하지만 <듄>을 마주하며 내 안의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듄>을 향한 아쉬운 목소리들은 대체로 빈약하고 불친절한 서사를 지적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어떻게 몰락하고, 폴이 어떻게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며, 메시아로 거듭날 준비를 마치는 것까지가 이야기의 전부다. 익숙한 영웅 서사에 빗대어 보아도 서막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 그럼에도 <듄>이 서사적으로 빈약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영화에 부족한 건 사건의 총량이 아니라 이야기의 총량이다. 사실 <듄>은 드니 빌뇌브의 영화 중에서도 드물게 친절한 편이다. 어쩌면 너무 친절한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각 인물들의 상태를 충분히 따라가고, 아라키스 행성의 상황도 충분히 관객 속에 스며들 때까지 기다린다. 다만 그렇게 완벽한 장면들을 뭉치고 뭉쳐 완성된 이야기의 덩어리는 우리가 목격한 것들의 웅장함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왜소하다.

<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드니 빌뇌브는 폴의 여정, 첫걸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적어도 프랭크 허버트의 <듄>에서 폴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메시아, 광신자, 학살자를 넘나든다. 이것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의 <듄>은 ‘(예견된) 메시아가 온다’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남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멋지다는 것? 프레멘들의 존재감이 신비롭다는 것? 용감무쌍한 던컨(제이슨 모모아)의 활약상을 더 보고 싶다는 것? <듄>의 이미지와 장면들이 너무나 많은 감흥을 남기는 데 반해 이야기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메시지를 위한 도구는 아니다. 나도 안다.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문구는 영화예술의 방패막이로 자주 인용되어왔다. 다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메시지가 아니라 질문이다. 표면적으로 인간인가 안드로이드인가를 놓고 따지는 것처럼 보였던 <블레이드 러너>는 그 끝에서 누가 더 인간다운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조차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 대한 탐문은 이어졌다. <듄>은 어떤가. 이야기가 메말라버린 자리에 어떤 질문과 가치가 남겨지는가. <듄>이 끝난 뒤 불 켜진 극장은 아라키스 사막처럼 황량하다. 황량하지만 그 사막은 분명 아름답기도 하다. 2부에서 이어질 여정이 확신에 찬 메시아의 행보가 될지 아니면 미완의 방랑에 그칠지 알 수 없다.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미 원작의 예정된 길을 미세하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이상 미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나는 그저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릴 뿐이다.



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전기

<전기차 무용론 톺아보기-긴글주의>

주가가 또 많이 빠졌습니다. 2020년 6월 첫 매수로 시작한 테슬라 투자, 지긋지긋하단 생각도 많이 듭니다. 무리한 투자로 고통 받는 분들이 없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엔비디아와 비트코인때문에 FOMO도 느끼시는것 같네요.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하락의 원인을 금리나 거시경제에서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 그쪽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해서 실제 영향을 주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 시각에서 이번 $TSLA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전기차 무용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용론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테슬라를 제외한 그 많은 전기차들, 처음엔 의기양양하게 투자를 해 가며 보기 좋은 신차를 많이 내 놨지만, 막상 이걸 몇만대씩 양산을 해 보니 내연차와는 차원이 다르게 원가가 높았던겁니다. 생산원가를 낮추기도 벅찬데 차세대 파워트레인을 적용한 플랫폼에 매년 몇천억씩 투자할 여력이 있을까요? 투자가 되지 않으니 3-4년전 플랫폼을 우려먹으며 제품을 내놓게 되고, 그러다보니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는 신차만 나옵니다. 내가 독3사나 제네시스만 타던 사람이면 '눈 씻고 찾아봐도 사고싶은 전기차가 없네. 이제 전기차 유행 끝물인가보다' 라는 반응이 나오는건 당연한 겁니다.

그러면, 정말 전기차의 시장침투는 여기까지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 국제유가는 언제나 주기적으로 전고점을 돌파합니다. 지금 한국도 유류세 할인이 끝나면 휘발유 2000원이 일상이 되게 되지요. 그리고 언제든지 그 위로 올라갈 여지가 충분합니다. 전기차 오너들은 많이 채워봤자 삼만원 쓰기 힘든데, 주유소 갈 때 마다 10~15만원씩 주유를 하다보면 사람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물론 충전걱정 때문에 PHEV로 기변하는 사람이 대다수겠지만요.

2. 그렇게 PHEV의 시장침투가 늘어나면 어떤일이 생길까요? 주유소는 줄어들고 완속충전기 보급은 늘어날겁니다. 이렇게 되면 range anxiety는 내연기관차를 모는 사람들에게 해당되지요. 기름값이 오르는거야 돈을 좀 더 주면 되지만, 경로상에 주유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넉넉하게 깔린 완속 충전기 때문에 전기차를 안 돌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며 전기차 전환은 꾸준히 이어질거라 생각합니다.

3. 아직도 쓸만한 전기차를 사려면 5천만원은 지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살만한 전기차가 없다' 라는 말은 저가 전기차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BYD도 한국에 공장을 짓고있고, 테슬라도 레드우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니, 3천만원대의 전기차가 출시되는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들이 한국에 출시 되었는데 주유인프라 부족한 내연차나 PHEV를 고집하는 사람, 100명중 10명이나 될까요? 가격은 국경도, 이념도 초월합니다.

전기차 무용론... 이건 내연차 회사들이 전기차 전환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만들어낸 궁색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곧이곧대로 믿고 전기차 주식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는건 참 뼈아픈 일이지만, 어차피 전기차 세상은 온다는것과, 전기차 섹터에서 제일 많은 돈을 버는건 테슬라라는 두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TSLA 를 호들할 이유는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테슬라의 전기차사업 말고 다른것들은 손가락아파서 쓰지도 않겠습니다.

2024년 3월 8일 금요일

ㅅㅅ

<피터 린치의 실수로 배우는 테슬라 장기 투자 교훈>

제가 가진 주식은 테슬라 단 한 종목입니다.

저는 만 4년 동안의 테슬라 투자로 돈을 한 푼도 벌지 못 했습니다. (그동안 매집한 주식의 평단이 현재 주가보다 높음 / 기간 있는 돈으로 한 짬짬이 스윙 투자 제외)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실패한 장기 투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일단 투자적인 측면에선 조금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테슬라 투자 때문에 𝕏를 하게 되었고, 일론을 알게 되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인생을 배웠고, 사람을 배웠고, 진실을 깨달았고, 제1원칙 사고도 배웠고, 마지막으로 투자도 배웠습니다. (돈을 벌어야만 배웠다고 할 수 없음. 돈을 잃는 것도 큰 배움 / 물론 손실 확정은 안했음)

그럼에도 가장 아쉬운 건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내 포트상 나름 의미 있는 비중이었던 엔비디아를 모두 팔아버린 것과 MDD -75% 하락과 장기 횡보를 전혀 예상(준비)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열어 뒀어야.. *$100 헐값에 추매하지 못해 너무나 아쉽..

<월가의 영웅>에 소개된 피터 린치의 한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적다 보니 떠오름)

피터 린치는 1971년에 $25였던 카이저 인더스트리*가 $13를 찍고, $11까지 떨어지자 "이 주식은 $10 아래로는 절대 내려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카이저 인더스트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Jeep 자동차를 비롯하여, 부동산, 알루미늄, 철강, 시멘트, 조선, 골재, 유리섬유, 엔지니어링, 방송 사업을 거느렸던 당시 엄청나게 우량한 기업. 부채도 없었음 (현재 테슬라와 닮았죠?)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추천에 피델리티는 500만 주(한화 약 732억 원*)를 매입했습니다.
*당시 미국 증권 거래소 역사상 최대 규모 거래)

그러나 카이저의 주가는 $8로 떨어졌습니다. $8 이하로 떨어지자,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도 주식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수 안 함)

2년 후인 1973년, 카이저의 주가는 $6 거쳐 $4까지 추락하였습니다. (전고점 $25 대비 -84% / 피델리티 매수가 $11 대비 -64%)

그러나 피델리티는 주식을 단 한 주도 팔지 않았습니다. 당시 피터 린치가 기업의 재무제표가 건전하다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죠.

피터 린치의 예상대로 머지 않아 카이저는 점고점($25)를 넘어 $30까지 폭풍 상승했고, 피델리티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위 폭락을 경험한 피터 린치는 그후 더 이상 "절대로 얼마 밑으로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터 린치의 모습이 마치 저와 같습니다.

저도 테슬라가 $414에서 -50% 떨어져 $200이 되었을 때 가까운 지인에게 강하게 추천하곤 했거든요. (테슬라는 그후 추가로 -50%가 더 빠져 $109 터치)

폭락한 주식을 손절하지 않고 계속 보유하고 있는 건 바보같아 보입니다. 당시 피델리티와 피터 린치도 갖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특히 다른 주식 다 오르는데 갈아타지 않고 오랜 기간 들고 있으면 정말 미련해 보이거든요.

테슬라가 위 카이저 인더스트리와 같이 몇 년 안에 반등에 성공할 지 안 할 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피터 린치급도 아니고요.)

솔직히 미래 주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테슬라의 경제적 해자가 무너졌나요? 여전히 독점적이며, 전기차는 물론 FSD V12는 정말 인간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테슬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애플이 10년의 시간과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은 자율주행 전기차를 포기했을까요?

사실 엔비디아와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기업입니다. 각자의 속도가 있습니다. 엔비디아는 인공지능 HW를 미리 준비했고 현재 폭발적 상승을 만든 것이라면, 테슬라는 Wave 1에서 2로 가는 중간에 있기에 다소 지루한 시간이라 볼 수 있는 거죠. (스타트업에 더 가까운 기업)

인터넷 시대에도, 모바일 시대에도 결국 돈을 더 많이 번 건 HW 기업이 아니라 SW 기업입니다. (테슬라는 아마도 둘 다겠죠?)

최근엔 테슬라 적자전환에 유상증자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죠? (아담 조나스)

현금 흐름도 흐름이지만, 테슬라가 가진 비트코인만 해도 1만 개가 넘는데 말입니다. (돈 없으면 비트코인을 팔면 되는데 굳 유상증자를?)

어쨋든 올해도 테슬라는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 테슬라는 머지 않아 피터 린치의 카이저 인더스트리 모먼트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

정신 승리라고요? 네 맞습니다! 🙏

2024년 3월 3일 일요일

< 영화 듄1,2 감상문 > (Spoiler 有)

※ 주의!! 진짜 졸라 김!!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토나옴!!!
※ FBI WARNING!!!: 세번째 문단 이후부터 듄1,2 영화 스토리가 담겨있으므로 만약 이 영화들을 아직 미관람 하였거나 앞으로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감상하고 싶다면 이 글을 읽지 마시오. 심지어 후속 스토리까지 꽤 많이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망하는 바임. 불안하면 읽지마시오!!! 분명 경고했음!!!

먼저, 나는 영화 <듄>의 영화적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한스짐머의 천재적인 사운드나 드니빌뇌브 감독의 주특기인 편집증적인 영상미 추구가 만들어낸 영화적 스펙타클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듄>의 스토리가 내재하는 독특성에 대해 몇글자 적어 보고자 한다. 왜 우리는 <듄>에 열광하는가?

본래 SF소설 <듄>은 1965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해당 작품의 원작자는 1920년 미국에서 출생한 기자 출신 작가 프랭크 허버트이다. 그가 <듄>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오레곤주 해안도시 플로렌스의 사구(dune)가 주택, 도로, 농장 등을 덮쳐 도시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을 취재하면서부터 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과 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 문명, 그 행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들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 내용들을 엮어 잡지에 기고하고자 하였다. 잡지 기고에는 결국 실패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수집했던 모래 사막에 대한 방대한 기초자료는 후에 <듄>을 집필하게 되는 초석이 된다.

허버트가 실제로 SF소설을 읽기 시작한 나이는 40대 부근에 들어서였고, 그는 과거 자신이 매료되었던 모래 사막의 장대한 풍광에 영감을 얻어 <듄> 집필에 착수한다. 6년간 그는 사구에 대한 각종 기초 자료, 테라포밍, 중동 이슬람 신화, 천문학, 아프리카/아시아 문화생태학 등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섭렵한 뒤 1년 반 동안 집필한 끝에, 역사상 최고의 SF소설로 손꼽히는 <듄>을 출판하게 된다. 이 작품은 출판 이듬해 SF소설계의 최고 권위를 가진 두 개의 양대산맥인 네뷸라상과 휴고상을 모두 수상하게 된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왜 우리는 <듄>에 열광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폴 아트레이데스라는 다크 메시아를 탄생시킴으로서 인류 역사에 뿌리 깊게 전승되어 흐르고 있는 메시아적 영웅 서사에 대한 완벽한 냉소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듄>은 사이언스 판타지다. <듄>이 <삼체>와 같은 하드SF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작중에서 등장하는 마술적인 초능력(superpower) 때문이다. 과학적 근거를 뛰어넘는 베네 게세리트의 보이스 능력, 과거/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능력 등의 설정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의 주요한 스토리라인에 빠져들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특히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며, 심지어는 하나의 미래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미래들을 모두 볼 수 있는 퀴사츠 헤더락의 능력은 그야말로 이 이야기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발생한다. 일반적인 메시아 서사는 남들보다 우월한 능력을 획득한 주인공이 모두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러나 <듄>은 남들보다 우월한 능력을 획득한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으로 인해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이야기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안티-테제로 등장하는 빌런들의 빌드업을 위해서는 이러한 스토리가 일부 가능할 수 있다. 수많은 마블 작품들에 등장하는 빌런들이 부분적으로 그러했듯 말이다. 그러나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그는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메인 캐릭터이다. 그리고 그는 베네 게세리트에 의해 계획된 메시아 서사를 오히려 정면으로 거부하고자 하지만, 결국에는 운명의 인과율 아래 마침내 우주적인 다크 메시아로 점차 진화해 간다. 다크 메시아의 탄생과 우주 최상위 권력으로의 등극, 그리고 이어지는 끔찍한 몰락의 과정이 방대한 SF 세계관과 작가의 풍부한 역사적 통찰을 통해 펼쳐짐에 따라 <듄>은 또 하나의 명작 스페이스 오페라로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메시아-역발상적 대서사시가 무려 "1965년"에 만들어진 상상력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잠깐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본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2024년 현재 다시 <듄>에 열광하는가?

이는 드니빌뇌브의 원작 <듄>에 대한 성공적인 영화화에 대부분 공로가 있겠으나, 나는 <듄>의 세계관이 바로 인공지능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아주 먼 미래에 벌어지는 "인간들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듄> 이야기의 시작은 A.G. 1만191년으로 A.D. 2만6천여년 쯤으로 해석된다(*A.G.: After Guild의 약자로, <듄> 세계관 내에서 "길드"가 생성된 이후를 뜻함). <듄>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버틀라리안 지하드(*우주에서 대규모로 일어난 반AI/반기계 운동)가 B.G. 201~108년에 진행된 이후에도 거의 1만년 넘는 세월이 지난 후인 셈이다. 원작에서 '너희들은 인간의 마음과 유사한 기계를 만들지 말지어다.'는 오렌지가톨릭성경의 구문처럼, <듄> 세계관은 모든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를 배제하기 위해 멘타트(*인간컴퓨터)들을 양성할 정도로 철저히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허버트의 또 한가지 매우 흥미로운 설정은, 초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듄> 제6부까지 모두 통틀어서 인간 이외의 지적인 생명체는 전 우주 어느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만이 <듄> 세계관 내 지적인 존재인 셈이고 결국 인간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

역사는 영웅을 원한다. 인류는 구원자를 원하고, 우리를 여러 모양의 낙원으로 인도해 줄 존재를 끊임없이 찾아왔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단연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이 개입되는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렇게 가장 "인간적인" 영역에서 메시아 서사를 끊임없이 도입하려는 우리들의 기획이 바로 <듄>이 대놓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듄>은 하드SF 소설들이 과학 기술에 집중하는 것처럼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정치/경제/문화 간 상호 작용을 아득히 먼 미래 배경의 사이언스 판타지를 통해 인간 본질과 그 역학 관계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 인류가 과거 경험했던 십자군 전쟁, 제국 식민주의 전쟁, 중동 오일 전쟁, 그리고 이제 오늘날에는 AI 반도체 전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반복되는 역사'임을 밝히며, 동시에 그 과정에서 중동의 무함마드/살라딘과 같은 영웅적 존재를 끊임없이 갈구했던 메시아 서사를 차용하면서도, 이를 다크 메시아 서사로 비틀어 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길고 장구한 연대기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반지의 제왕>을 만든 J.R.R.톨킨과 같은 독실한 종교인들은 <듄>을 "사실 저는 듄을 상당한 정도로 싫어합니다(In fact I dislike Dune with some intensity)."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원작소설 <듄> 제5부 "듄의 이단자들" 중에는 프랭크 허버트가 작성한 "<듄>을 쓰고 있을 때"라는 글이 있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메시아의 신화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했다.
이 책은 인간이 점령한 행성을 에너지 생산 기계로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 책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작용을 꿰뚫어 보아야 했다.
이 책은 절대적인 예언과 그런 예언의 함정을 조사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이 책은 의식 확장제를 등장시켜 그런 물질에 의존하면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얘기해 주어야 했다.
식수는 석유와, 날이 갈수록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물 그 자체에 대한 비유가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인간적 가치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사와 사람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를 지닌 생태 소설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쓰면서 항상 각각의 층들을 주의 깊게 감시해야 했다."

영화 <듄:파트2>의 제작비는 약 2,500억원 가량이 소요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드니빌뇌브는 이번 작품 흥행이 성공하게 되면 <듄:파트3>까지 제작하여 듄 트릴로지로 모든 스토리를 마치겠다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다. 개인적으로 읽진 않았지만, <듄> 원작 소설에서 1~2권까지가 정확하게 듄 세계관 소개와 폴 아트레이데스를 중심으로 한 다크 메시아 서사가 마무리되는 내용인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 3권부터의 내용은 더욱 괴기하고 기상천외한 내용들이 많아 아마 드니빌뇌브가 다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본다. <듄:파트3>에서는 결과적으로 다크 메시아가 어떻게 몰락하기 시작하는지, 왜 모든 미래를 볼 수 있는 메시아조차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결론적으로 자유의지(freewill)를 상실당한 인류의 미래란 얼마나 암울한 것인지를 비극적으로 그려낼 것으로 예상한다. 원작과 달리 챠니를 마지막에 떠나보낸 드니빌뇌브가 어떠한 각색을 <듄:파트3>에서 가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원작소설 <듄>은 제6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프랭크 허버트는 <듄> 스토리를 마침내는 결론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85년에 출간된 마지막 제6부에서 프랭크 허버트는 자신이 이제 더이상 이 방대한 스토리를 마무리 짓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갑작스럽게 제6부 마지막에서 다니엘과 마티라고 하는 신비로운 노부부 둘을 출연 시킨다. 둘은 정원에서 일하며 서로 담소를 나누는데 <듄>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미 그들이 작가의 손을 떠나 너무 멀리 왔음을 인정하는 듯한 내용을 언급한다고 한다. 이 두 노부부가 프랭크 허버트와 그의 부인 비벌리 허버트라는 설이 주요하게 지지를 받고 있고, 끝에는 프랭크 허버트가 아내 비벌리 허버트를 추모하며 6권을 마치게 된다. 1985년 출간 시점 1년 전 아내 비벌리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7년 프랭크 허버트 또한 숨을 거두게 된다. 그가 미완으로 남겨두었던 <듄> 제7부의 노트를 보면 <듄>의 결말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 정치가 붕괴하고 전 우주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한다.

AI 시대가 도래하며 점점 더 화려해지고 눈부시게 기술이 발전해 나가는 오늘날이다. 그런 2024년에, 오히려 모래만이 가득한 사막 행성이 안겨다 주는 가장 원초적인 자연이 미래가 되는 작품. 그리고 그 어떤 SF 작품보다도 기술이 아닌 인간만을 위해 인간 문명의 본질에 집중한 작품. 방대한 우주적 세계관과 상상력을 동원하되 앞으로도 오래도록 인류가 기억해야 할 메시지를 전달한 작품. 자미스는 말한다: “The mystery of life isn't a problem to solve, but a reality to experience."

하여,
AI가 아무리 무한히 발전해도
우리에게 결국 필요했던 것은..

절대적 영웅이 아닌 작은 인간성(humanity)
바로 그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2024년 3월 3일
폴 무앗딥 말술 박톰